한산이씨 소개

“ 한산이씨 유래(由來) ”



경북 안동시 일직면 소호리(현.망호리)에 세거하는 한산이씨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한산으로 삼게 된 것은 고려 중엽에 호장(戶長)을 지낸 이윤경(李允卿)을 단일시조(單一始祖)로 하여, 6세에 이르러 성리학(性理學)의 대종(大宗) 문효공(文孝公) 가정(稼亭) 이곡(李穀, 1298~1351)이 원(元)나라 제과(制科) 전시(殿試) 등에 네 번이나 급제하고 원의 순제에게 간하여 공녀제도(貢女制度)를 폐지케 하였으며,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고, 7세인 공의 아들 문정공(文靖公)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이 문과에 장원급제하시고 다음해 원(元)의 전시에 합격하시어 두 나라의 온갖 중요 요직을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셨고, 성리학의 유종(儒宗), 대학자이자 문장(文章)과 절행(節行)이 세상에 알려졌고, 고려의 사직을 위해 절의(節義)와 기개(氣槪)를 다한 삼은(三隱)중의 한 분으로 존숭(尊崇)되고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해지면서 가정과 목은 양대(兩代)를 중시조(中始祖)로 받들고 한산을 본관(本貫)으로 하였다.

8세 이종덕(李種德)은 고려 말엽 추성익위공신(推誠翊衛功臣)으로 시호는 “문양(文讓)”이었다.

9세 청허재(淸虛齋) 이맹진(李孟畛)은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봉해졌으며, 중국 사신이 '동방의 문장(文章)'이라고 칭송하며 공경하였다는 일화(逸話)가 전하기도 한다.

10세 이연기(李衍基)는 통정대부 판군기감사(通政大夫 判軍器監事)이다.

11세 이서(李湑)는 어모장군 충좌위부사직 계보관사맹부사직(禦侮將軍 忠佐衛副司直 癸譜官司 猛副司直)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贈 嘉善大夫 吏曹參判)이다.

12세 이윤번 (李允蕃)은 가선대부 사간원 대사간(嘉善大夫 司諫院 大司諫)을 지냈다.

13세 이귀지(李貴枝)는 중훈대부 풍저창 직장 (中訓大夫 豊儲倉 直長)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贈 通政大夫丞政院左承旨)를 지냈다.

14세 이희백(李希伯)은 연안 부사(延安府使)를 지내고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贈 嘉善大夫 吏曹參判)이 되었다.

15세 이대형(李大馨)은 찰방(察訪) 증 사복정(贈 司僕正)이며, 직장 남궁혜(南宮蕙)의 따님인 함열남궁씨(咸悅南宮氏)를 아내로 맞아 융경 무진년(1568, 선조1)에 이인도찰방 (利仁道察訪) 증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贈 承政院 左承旨 兼 經筵參贊官)인 해산(海山) 이문영(李文英, 1568~1598)을 낳으셨다. 당시 서애(西厓) 문충공(文忠公) 류성룡(柳成龍))과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가 모두 따님이 있어서 사위를 고르고 있었는데, 서애는 부군을 얻었고 아계는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을 사위로 얻었으니, 대개 한때에 명성이 서로 막상막하였다고 하며, 연안(延安) 박효생(朴孝生)이 지은 숙부인(淑夫人)에 대한 만시에‘사위는 당시의 영재를 골랐고(夫壻擇時英) 라고 한 것이 이것을 두고 말한 것이라고 한다. 공은 총명함을 타고나서 8, 9세에 이미 시를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으며 조금 자라서는 명예가 더욱 커져서 거리의 아이나 시장의 늙은이들도 모두 그 이름을 외웠다고 한다.

17세인 수은(睡隱) 이홍조(李弘祚, 1595~1660)는 본래 서울 낙선방(樂善坊)에 살았는데, 광해군 때에 폐모론(廢母論)이 제기되자 삼강(三綱)이 무너졌음을 탄식하는 외조부인 서애 유성룡의 권고로 외가가 있는 안동으로 내려와 입향 시조가 되었으며, 병자호란시 안동의병장에 추대되었고, 회인현감(懷仁縣監)을 지냈다. 이후 문정공(文靖公)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의 덕이 백세 뒤의 후손에게도 미치므로 안동의 형제들은 모두 정(靖)자를 넣어 이름을 지었고, 이는 근본을 생각하는 뜻을 보인 것은 수은공(睡隱公)의 현손인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1)으로 1735년에 문과 급제하였으며, 주자서절요와 심경․ 근사록 등을 탐독하였고, 쇠퇴해진 퇴계학을 계승하여 성리학을 체계적으로 정립하여 수준을 높여 성리학을 다시 꽃피웠으며, 당세의 종사(宗師) 대학자가 되었으며,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 1714~1789) 또한 형 대산공(大山公)과 함께 독서하며 수신에 힘써 대학자가 되었다.

특히, 대산공(大山公)은 문중의 부흥에도 진력을 다한 공덕으로 인해 약와(約窩) 이현정(李顯靖)은 1763년 문과 급제를 하였으며, 홍문관 교리, 수찬, 종부시정, 지제교를 지냈으며, 입재(立齋) 이몽정(李夢靖)은 문장이 이승사달(理勝辭達)하고 평역박실(平易樸實)함을 추구하였고, 화암(華巖) 이사정(李師靖)은 성리학을 연구하여 사림의 추증을 받았으며, 면암(俛庵) 이우(李 禹 垌 )는 1792년에 올린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신원을 청하는 영남만인소에 소두로 추대되었고, 간암(艮巖) 이완(李埦)은 문과급제, 홍문관 교리를 지냈고, 이곤(李堒)은 생원시, 이경(李 敬 垌 )은 진사, 이익(李 益 垌 ), 이헌(李 憲 垌 )은 사마시 합격을 하였다.

또한, 면재(俛齋) 이병운(李秉運)은 순조 때 사마시에 합격하여 현감을 지냈으며, 청백리로 명성이 있었고 이조참의에 증직되었으며, 소암(所庵) 이병원(李秉遠)은 司僕寺主簿을 지냈고, 신암(信菴) 이병하(李秉夏)는 학행으로 칭송을 받았으며, 설죽(雪竹) 이병은(李秉殷)은 빈한(貧寒)해도 주야를 가리지 않고 독서 궁리하여 상당한 학문적 성과를 이루었고, 이병규(李秉圭), 격와(格窩) 이수응(李秀應), 이수필(李秀弼)은 헌종 조에 사마시 합격을 하였고, 대은(大隱) 이수영(李秀塋)은 예설(禮說)에 뛰어났으며, 긍암(肯庵) 이돈우(李敦禹)는 1850년 문과 급제를 하여, 이조참판을 지냈으며, 장고(樟臯) 이응직(李應稷)은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기암(企庵) 이돈욱(李敦煜)은 1876년에 문과 급제를 하여, 1891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지냈고, 이외에도 수많은 명유(名孺)가 배출되었다.

이로 인해 안동에 세거하는 한산이씨는 문효공(文孝公) 가정(稼亭) 이곡(李穀), 문정공(文靖公) 목은(牧隱) 이색(李穡) 양대에 일어난 명성이 세대를 지나 대산공(大山公), 소산공(小山公)이 소호리에서도 일으킨 학문이라 하여 호학(湖學), 대산학맥(大山學脈), 영남퇴계학(嶺南退溪學) 등으로 일컬어지며, 세상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와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 항일정신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기에, 이를 바탕으로 오늘날에도 후손들은 선조들의 학문과 덕업을 계승하고 문중수호를 위해 일생을 다 바치고 있다.